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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조 어찰첩 - `호로자식·젖비린내` 화끈·과격한 표현

알암브라 2009. 10. 22. 09:39


정조 어찰첩
'호로자식·젖비린내' 화끈·과격한 표현


 

 

어찰첩 통해 본 정조의 리더십

 

정조의 비밀편지가 9일 무더기로 발굴, 공개되면서 정조시대의 정치상황을 훨씬 풍성하게 조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번에 발굴된 정조의 편지들은 그가 죽은 뒤 만들어진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도 전혀 소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 정조의 막후정치와 당파관리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 타입의 군주로 널리 알려진 정조대의 사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정조편에 남아 있다. 여기에 새롭게 발굴된 정조의 편지는 수신된 날짜가 꼼꼼히 기록돼 있어 기존 사료의 이면에 존재했던 사건의 내막과 숨겨진 의도를 밝혀주는 길잡이 노릇을 한다. 특히 정조가 편지를 통해 신하들의 행위와 발언을 치밀하게 지시하는 등 공작정치를 펼쳤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식’ 사료의 재해석 문제가 대두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정조는 심환지가 속한 노론 벽파(僻派)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남인 시파(時派)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는 정조 말년의 시대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벽파에 대한 정조의 입장이 적대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각 당파를 관리하면서 일종의 ‘등거리 정치’를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정조는 1800년 5월30일 보낸 편지에서 “경들처럼 이렇게 두려워하고 모호해서야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벽파의 분발을 촉구하고 시파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했다.

 

정조가 인사문제에 있어 벽파와 시파, 남인과 소론의 안배를 강조한 탕평책을 계승했던 것처럼 각 당파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한 도구로 비밀편지가 긴요하게 사용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노론 벽파를 정치권에 끌어들여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정립시키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시파계 인물에게도 편지가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정조는 다혈질 인물

 

정조는 심환지가 비밀편지의 내용을 누설했다고 수차례 질타하는가 하면 상당히 과격할 정도로 인물평을 늘어놓는 등 격정적인 면모를 보였다.

 

예컨대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칭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였던 김매순(金邁淳)에 대해선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라고 혹평했다.

 

비밀편지의 특성상 구어체와 속담, 비속어도 자주 등장한다.

 

“이 떡을 먹고 말을 참아라”라고 한다거나 “개에 물린 꿩 신세” “꽁무니를 빼다” “말할 건더기”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한문 편지 중간에 난데없이 ‘뒤죽박죽’이라는 한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뒤죽박죽’을 썼을 수도 있고, 격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가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독살설은 기각될 듯

 

<정조실록>은 신하들을 접견하던 정조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심환지가 다급하게 정조의 입에 인삼차, 청심원 등의 약을 넣었지만 삼키지 못했고 며칠 뒤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더해 심환지가 정조와 대립했던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편지들에 따르면 심환지는 정조의 정적이기보다는 그의 심복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에서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키려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며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로 친근감을 보였다.

 

특히 정조는 말년의 편지에서 자신의 병세를 여러 차례 소상하게 언급했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왕조시대에 왕의 병세는 극비에 속한다.

 

그를 믿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그는 죽기 두 달 전인 1800년 4월17일자 편지에서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네. 눈곱이 짓무르지 않을 때 연달아 차가운 약을 먹으면 짓무를 기미가 일단 사라진다 …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라고 호소한다. 사망 13일 전이자 심환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주제도 심각한 병세에 관한 것이었다.

 

안대회 교수는 “편지로 볼 때 정조의 사인은 병에 의한 자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 비밀편지가 빛을 보기까지

 

연구팀은 1년여 전 개인이 정조의 어찰첩을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그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진본을 확인했다. 김문식 교수는 “이 자료는 기본적으로 심환지 집안에서 나왔지만 현재의 소장자는 심환지 집안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책자 형태로 표구가 된 것은 해방 이후 시기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 299통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었으며, 10여명의 전문가가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작업에 투입됐다. 연구팀은 조만간 각 편지의 사진과 번역문 등을 묶어 책자로 발간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김재중기자>

 

 

다혈질 군주…관료악평 예사 “젖비린내·호로자식” 언사도

 

정조는 <이산> 등의 드라마와 소설 등에서 준수한 외모의 성군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비밀편지들은 전혀 다른 그의 이면적 성향을 드러내준다. 성격 급한데다, 입이 걸어 당대 유명인사들에게 욕설과 비속어 섞인 악평을 퍼붓는 ‘다혈질’이기도 했던 것이다.

 

편지들은 구상이 진척되지 않으면, 마구 화 내고 거친 글로 분을 푸는 신경질적인 면모를 곳곳에서 보여준다. 정조는 국정 전반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시사(時事:정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 속에 불길을 치솟게 만들 뿐”이라고 내뱉었다.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했고, 촉망받던 젊은 학자 김매순은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으로 혹평했다.

 

1799년11월24일 편지에서는 학문적 정적을 비방하는 일부 유생들을 겨냥해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라고 자신의 품성을 자평하기도 했다.

심환지에게도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생각 없는 늙은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와 명사라도 정조 입 앞에서 온전한 이는 없다고 할 정도”(안대회 교수)였던 셈이다.

 

그는 학자 군주답게 유머 감각도 일가견이 있었다. ‘껄껄【呵呵】’ 등의 의성어와 ‘개에 물린 꿩 신세’‘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을 구사했다. 한문 편지 중간에 뜬금 없이 ‘뒤죽박죽’, 행색이 초라하다는 뜻의 ‘만조’라는 한글 단어가 툭 튀어나오는 구절들이 보여 흥미롭다. 안 교수는 “의미를 뚜렷하게 전달하려했거나 마땅한 한문 표현을 생각하지 못해 급한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밖에 심환지 부인의 병환을 염려하며 삼뿌리를 보내고, 전복과 조청을 선물하는 등 속깊은 인정을 보여주는 대목도 등장한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출처 : 정조 어찰첩 - `호로자식·젖비린내` 화끈·과격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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